불행한 여자의 글쓰기와 마음의 구멍
반백수는 하던 일을 중간에 내려놓고 평일 낮부터 영화 세 편을 연타로 때리기 위해 집을 나섰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SIWFF 올해로 3년 째 꾸준히 참석(?) 중인데, 생각지 못한 영화들을 만나는 재미가 있어 매년 우산 들고 찾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번도 다르지 않아 영화 세편 다 보고 돌아오는 길엔 비가 그쳤더군.
글 쓰는 여자들이 나오는 영화들 위주로 골랐다. 잉게보르크 바흐만과 아니 에르노. 중간에 <질투는 나의 힘>은 동명의 시를 떠올리며. 세 편의 영화 각각 다른 의미로 만족스러웠는 데, 까먹기 전에 쓱쓱 써볼까 싶어 노트북을 켰다. 긴 글을 예상합니다.
1.
잉게보르크 바흐만 : 사막으로의 여행 (2023)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67431
- 아니 그러니까, 어…언니 잠깐만요… 하…. (나의 한줄 평)
전후 독일 문학계의 독보적인 여성 시인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연애 실패담을 다루고 있는 영화. 친구가 좋아하는 여성 작가라는 것 말고는 아무 정보 없이 봤다. 이름…이 너무 어려워서 지금도 안 외워지지만. 영화는 한번 더 보고 싶다. 시인이 이별이 가져다준 앎을 통찰해 낼 때!!! 사랑을 누가 말리는가 했다. 여튼 잉게 온냐. 제가 책 다 찾아 읽을 거임😘
개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혹은 만들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에 이름 붙인 것을 ‘사랑’이라고 하자. 어디서 베낀(읽은) 것 이 분명하긴 한데, 출처가 기억나지 않으니 공쟝쟝 임의의 편집 각주다. 그렇다 사랑. 사랑은 대체 무엇이길래~~
나는 요즘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하는 데(사랑을 하고 있다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성애, 모성애, 팬덤, 신앙을 포함해. 사랑이라는 것은 언제 태어나며 무엇 때문에 겉잡을 수 없어지는 가.랄까.
자신이 부족하게 느끼는 부분(그것은 결핍, 취약함, 부족 지점, 감추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에게는 당장은 없다는 지점에서 어쨌든 ⊖의 성질을 띤 것 같다)을 가지고 있는 타자를 마주쳤을 때 화르륵 타오르는 것이 아닐까. 여하튼 사랑의 시작은 투사다. 민감한 작가들은 이 심리학 개념을 몰라도 그 역동과 진실을 안다. 실제로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내게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아 그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 부족하다는 것은 조금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은 내 안에 있는 것. 대상으로 인해 촉발된 나 자신의 대단히 강렬한 변화에의 의지. 그 원료가 없다면 촉발되지 않는다.
내게 일어났던 사랑이란 그랬다.
결국에는 자신이 살고 싶은 삶으로의 성장과 변화이겠지만. 내게 필요하다는 그 인식을 주체 스스로 셀프로는 해낼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인간은 그런 특징(스스로는 스스로를 볼 수 없다)을 가지고 있다라고 추측함. 추측만 함.
때문에 ⊖(결여)가 아주 크거나, 변화의 의지가 아주 클 때. 사랑의 체험이란 치명적이고 강렬해지는 것 아닐까. 모든 변화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으니…. 욕망, 그건 고통과 함께하는 일종의 열락. 변화란 본질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것. 기투.
사족 붙이기. 육중한 내 몸을 사랑에 던지고 하기에 본인은 근육과 기력이 없으므로… 코어도 없고요… (오늘도 필테쌤이 때찌때찌 쟝쟝님쟝쟝님쟝쟝님 내 이름만 천 번 부름.) 나의 기투는 몸을 극도로 사리는 정신적 기투로서(몸을 사린다고 하지만 책은 몸으로 읽는 것 입니닼ㅋ) 기왕이면 *이미 죽은, 책을 쓰는 사람*들을 사랑하기로 하였는 데… 이는 현실 사랑에 상처받거나 파멸하지 않기 위한 최고의 방어 전술이 아닐까. 싶습니다? 꺄륵.
재능 있는 두 여남 작가의 (그렇다 작가의 사랑이다!!!) 치명적인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이미 천자를 할애하였다😮💨. 영화가 보여준 사랑의 시작은 그런 모습이었기에.
시인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잉게보르크 바흐만은 스위스의 극작가 막스 프리슈를 만나 사랑에 뿅 빠져버린다. 친구는 그녀를 말리지만 그녀도 막스도 막무가내다. 당신의 시를 다 외웠어요. 너 없으면 나는 글을 쓸 수 없어. 짐 싸서 살림을 합치고. 지적으로 육체적으로 끝내주게 충만한 날들이…
얼마 못 간다 ㅋㅋㅋㅋㅋㅋ
아침 마다 두개골을 울려대는 그의 타자 소리. 나도 모르게 하고 있는 식사 준비와 설거지. 젊고 아름다우며 재능이 출중한 여자 시인은 심지어 박사(검색 결과: 바흐만 언니 하이데거랑 비트겐슈타인으로 논문 쓴 사람)에 당시로는 드문 비혼주의자 여성였음에도. 이국에서 고립되어 남자에게 기를 쪽쪽 빨린다. 시를 쓸 수가 없어!!!
헤어지는 방법을 모르겠는 연인은 왜 그렇게 싸울 때 똑같은 모습일까. 영화를 보면서 현타가 오지게 왔다.
자기보다 똑똑한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판타지, 열등감과 독점욕. 남자는 사랑을 미끼로 지배하려들고 길들이려 하고, 여자는 사랑받고 싶어 참다가 반항하고 스스로를 의심하다 그로 인해 포기된/한 것들을 알아차리게 된다. 나에게 무한한 영감을 불러일으키던 그/녀는 이제 없다.
영화를 보면서 계속 생각했다. 작가와 작가가 만나 서로를 사랑하는 일에 대해(이 주제에 대해서는 앞으로 계속 생각해 볼 요량이라 더 적지는 않도록 한다). 또 그와 열정을 나누다가 그의 재생산 노동을 담당하게 되어버린 넘치는 재능에 걸려 넘어지고만 숱한 여성 예술가들에 대해.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의 잉게 언니는. 막스의 영감으로만 머무르기엔 너무 잘난 여성이시다.
인상 깊었던 장면 1. 자신을 철저하게 대상화한 그의 (숨겨진) 일기를 읽으며 그녀가 비분강개하는 장면. (막스가 잘못했지만 그래도 지못미…)
재현 윤리에 관한 두 작가의 언쟁이 이어졌는 데, 대단히 철학적이며 젠더적이었다. 감독의 생각이 반영된 연출과 각본일테지만, 작품세계와 인물들에 대한 공부와 이해가 근간이었을 듯. 자기가 뭘 쓰는 지 모르고 막 쓰는 사람들도 많은데, 바흐만은 시인 이전에 철학을 공부하는 여성이었고. 그녀는 자신이 뭘쓰고자 하는 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를 정확하게 다루고자 했던 이이의 책들을 찾아 읽어봐야지 마음 먹음.
장면2. 그녀가 이별 후 보게된 지독한 사랑에 대한 뼈 아픈 인식을 동행자에게 들려주는 장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그토록 치열한 종류의 앎을 내게 준다면, 사랑. 해볼만한 것이지 않을까. 어쨌든 바흐만은 전후 독일의 시인이다. 무슨 말이냐면, 파시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란 이야기다. 대략 이런 종류의 대사였는데 (기억이 잘 안난다. 지금부터는 내 뇌피셜주의)
“파시즘이 무엇인지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어요.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따로 떨어져있지 않다고 난 여기는 데. 최초로 세상에 나타났을 때는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서 였을거예요. 아마.”
대체 어떤 지독한 사랑을 해버렸기에 거기서 파시즘을???🫢이 아니다. 책 <가부장제의 창조>를 떠올리긴했지만 그것도 아니다.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인간이 어디까지 악랄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지는 멀리 아우슈비츠가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무엇인가를 똑바로 보면 되는 거라고. 만약 그것을 정직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현실의 아우슈비츠를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에, 또 너무 심오해지네. ㅋㅋㅋ 그리고 또 인상적이지 않을 수가 없는 장면은. (지금부터 스포주의) 바흐만이 프리슈와 헤어지고 아주 심한 트라우마 상황을 타개하고자 사막으로 떠나서…
나를 이용하고 길들이려하고 가스라이팅한 유럽 부르주아 지식인 중년 남성의 억압에서 벗어나서 모래바람 맞으며 자유야!!!(실제로 이런 대사ㅋㅋ) 외치는 일에 꼭 필요했던 것은 함께 떠나줄 젊은 남자…인 것 나 이해한다.
그런데, 굳이 거기서.
아니 그러니까, 어…언니 잠깐만요… 하… 젊은 남자 세 명과 한 침대를 꼭… (두명은 사막에서 만난 아랍계) 그 것은 영화적 설정인가 실화인가. 실화든 픽션이든 중요하지 않다. 내 안의 유교걸은 당황한 나머지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으어어어… 으으… 하…!!! 이거 성별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나를 상처준 나쁜 년을 잊기 위해 중년 남자 작가가 팬이라며 접근한 젊은 여자 애인을 데리고 멀리 동양까지 떠나 현지에서 맘에 드는 여성 두 명. 총 세명의 여성에게 한 침대에서 서비스를 받으면….
써지지 않던 시가 써지는가요? 🤷🏻♀️
그렇지만 또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여/남을 떠나서 성립이 안되는 게ㅋㅋㅋ 그리고 가부장제란 인류 보편의 억압인게(정말 파시즘의 원형답다) 이 젊은 남자 아랍인들은 금발의 그녀랑 자고 싶어 드릉드릉 플러팅 함. 난 남자가 너무 좋아. 젊은 남자를 사랑해!!를 숨기지 않는 잉게언니는 이때다 하면서 너 콜? 나 콜! 잤잤잤!! ㅋㅋㅋ 그렇다. 이 장면은 서비스를 받았다(?)기 보단 좋은 교환(?)이었던 것!
아. 섹스란 무엇인가. 여남사이에 정말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단 말인가!!! 그리고 나는 언제까지 사랑으로 시작해 섹스로 끝나는 글을 써댈 것인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냥 좀 해!! 라는 언니들의 말이 멀리서 메아리 치듯. 들려온다.
2.
질투는 나의 힘 (2002)
박찬옥 감독
- 박해일 예쁘다. 근데 이게 왜 여성 영화? (나의 한줄 평)
진짜 왜 여성 영화제에서 나온 건지 모르겠다. 감독이 여자라서? 배종옥이 주체적으로 성생활을 영위하는 여성이라?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남자 영화(알탕이라고까진 못하겠지만)다. 필립 로스의 소설을 읽을 때 느낀 그런 기시감이 들었는 데…ㅋㅋㅋ 여기서 박해일이 사랑하는 것은 배종옥이나 서영희가 아니다. 박해일은 질투의 대상인 문성근(편집장)을 사랑한다. 이건 내 과도한 해석이 아니라 리얼 참 트루다.
화제의 장면(?)이 있다면 아마 “누나, 나도 잘해요.”하면서 하는 장면 일텐데. 그러니까 박해일은 누구랑 섹스를 하는 거냐. 누나랑? 아니지. 편집장한테 바람맞고 홧김에 순진한 처자(서영희)랑 자는 것도 그래. 나는 묻고 싶다. 얌마. 너는 누구랑 하는 거냐. (박하사탕도 그렇고 2천년대 초반 한국영화의 한계다. 상처받은 남자 위로해주는 건 그 옆의 기구한 팔자의 여자.)
그러니까. 인간은. 왜.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지어는 착취하는 권력에게(일수록) 그토록 인정받고 싶어하는 걸까. 앞의 주장(?)과 일맥 상통하는 것인데. 우리는 정말로 내게 있지만 내게 부족한 것을 가지고 있는 대상을 사랑하게 되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박해일이 사랑하는 것은 그 자신을 멋대로 부릴 수 있는 문성근의 권력이고 거기서 나오는 매력이다. 편집장 곁을 서성이며 편집장의 여자들에게 왜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느냐 괴로워할 게 아니라 걍 편집장에게 가서 사랑해달라고 하세요. 제발. (그리고… 영화는… 결국…)
(미모에 묻히지만 <살인>부터 <헤.결>까지 박해일은 한남 그 잡채들을 연기해왔다. 이 영화도 그러하다 ㅋㅋㅋ)
내가 이입이 되었던 사람은 당연히 박해일이 먹버한 K-장녀 서영희 였는 데. 버리고 싶지만 버릴 수 없는 가족. 사랑하지만 사랑해주지 않는 남자. 그녀가 사랑한 것은 박해일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구원이었겠지. 원가족에서 다른 가족으로의. 오랫동안 많은 여성들이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방법이지만. 그런 종류의 구원(특히 결혼)은 환상이다. 인류가 한쪽 성별에게 5천년 동안이나 가스라이팅해 온 구원 서사인데, 신자유주의 덕분에 파탄나고 있는. 이제는 로맨스에서도 안써먹는 진부하고 재미없는 결말.
2020년대의 대한민국, 서열 경쟁에서 탈락된(진입할 의지조차 상실한) 대다수의 젊은 남성들은 더 이상 여자에게서 위로와 우쭈쭈를 바랄 수 없게 되었다. 구원서사 폐기하고 어디 한번 제대로 능력으로 경쟁해 보자는 여자들만 득시글. 천만명이 1인 가구, 그 중 절반이 빈곤층이라는 한국은. 서로가 서로의 구원이 되지 못함을 불가피하게 알아차린 여남들이 새로운 형태의 사랑을 발명해내지 않으면 천천히 멸종할 것이다.
3.
슈퍼 에이트 시절 (2022)
아니 에르노, 다비드 에르노-브리오 감독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61370
- 아니!! 에르노의 아들들이 계속해서 잘생겨지기만 한다... (나의 한줄 평)
30대의 아니 에르노(아직 작가로 데뷔하기 전 ~ 두편의 소설을 낸 후)의 가족 생활이 담긴 홈 비디오다. 남편이 10년간 찍었고, 이혼하면서 남기고(버리고) 간 필름을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아들이 편집하고 에르노가 코멘트를 달아 나레이션 했다.
인상 깊었던 대사는 “책 하나로는 인생이 바라는 만큼 달라지지 않는다”
와, 이 대작 <빈 옷장>(요즘 읽고 있음)을 출간하고 에르노 성림이 쓰셨다는 일기의 문장 되시겠다. 하… 대가 답다!!! 역시 사람이 야망이 있어야 한다. 종의 복수 정도는 염두하고😤 책 출간 정도는 뭐 걍. 그게 인생의 목표일 순 없지. 암요. 그래도… 책 쓰는 거 아무나 못하는 건데🥹 그럼 몇 권을 써야 인생이 달라지나요… 구질구질 내 인생도 달라지는가?
화질이 좋지 않은 70년대의 필름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두 어린 아들들의 깨발랄한 장면과 대비되는 아니 에르노의 표정들인데. 모든 장면에서 (행복했다는 나레이션을 덧붙이는 순간에도) 그녀의 표정은 시종일관 우울해 보였다. 소설을 쓰고 난 후에는 더더욱.
그러니까 내가 언제나 불만을 품게 되는 그 문장.
행복한 여자는 글을 쓰지 않는다는.
그러므로 내가 언제나 반목하게 되면서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절반의 문장.
행복한 여자는 글을 쓰지 않는다. 는.
그림같은 여행지에서. 잘생기고 부유한 남편과 아름다운 두 아이와. 육아를 거들어주는 엄마와 함께 살며 안정적인 자기 직업까지 있는 이 젊은 여성이. 심지어 오랜기간 마음 먹어왔던 소설을 써내고 그것으로 인정까지 받은 상황에서. 누군가 찾아와 당신만큼은 행복해야하는 것 아닌가 하고 당위처럼 따져 물어도 할말이 없을 판국에.
영상 속 그녀는 어색해 보였고, 사람들과 섞이지 못해 어정쩡해 보였고, 무엇보다 우울해 보였다.
오랫동안 나는 글을 쓰기를 주저했다. 행복한 여자는 글을 쓰지 않는다는 그 문장 때문에.
그러다가 나는 썼다. 글을 안써도 행복하지 않아서.
그리고 이제는 쓴다. 행복한 여자는 글을 쓰지 않는다는 문장을 부수고 싶어서.
행복은 무엇인지.
여자는 누구인지.
글이란 어떤 건지.
쓴다는 것은?
하나하나. 집요하게. 따지고. 물어가면서.
나는 글을 쓸 때 행복하다.
누군가가 행복이라고 정해놓은 문법들 속에 정확하게 들어있는 한 여성. <얼어 붙은 (그) 여자>는 행복하지 않았기에 글을 썼을 것이고, 글을 쓰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게된 것은 아닌가 되물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썼다.
나는 이 영화에서 글을 쓰는 30대의 어떤 여자를 보았다. 행복을 느껴야할 곳에서 행복하지 않은. 영광은 아주아주 멀리 있고, 삶은 아주아주 가까이 있고, 써야만 하는 것은 써야할 테고, 쓰는 것이 사랑하는 것임과 동시에 사랑하는 것들을 잃어가는 것은 아닌지를 의심하면서. 그러나 자신에게 솔직하기로 한.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써야만 한다고 느꼈던. 아름다운 이국의 여행지에서는 서랍에 있는 원고를 떠올리며, 모든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순간에 멀찍이 서서 좀 처럼 신나하지 못하는 한 여자.
사랑한다. 필름 속 그녀의 멜랑꼴리를. 행복에 적응할 수 없음을. 사색 중인 딱딱한 표정을.
써야 하는 자신 안의 소명을 따랐던. 마침내 승리하는 그녀의 삶을.
그리고 용기를 내서 이런 문장을 쓴다.
써야하는 사람은 써야 한다.
당신이 무엇을 쓰는지 당신은 아직 알지 못한다.
영화 속의 아니 에르노 처럼.
덧, 억압의 표징들이 명확한, 이제는 사라진 사회주의권 나라들의 실제 풍광에서 당시 느꼈던 바들에 대한 회고도 이 영화의 매력적인 부분이다. 소설가 아니 에르노와 영화는 일관되다. 그녀는 정말로 그녀가 쓸 수 있는 것을 썼다.
2023-08-31